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주 대학살 (문단 편집) == 학살에 대한 해석 == 현대에 서주 대학살이란 명칭이 한국 《삼국지》 팬덤에 의해서 부각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서주 대학살이라는 명칭과 이미지는 한국 팬덤이 만든 것이 아니라 2000년에 한국에서 발간된 한 일본의 《삼국지》 인물평가 서적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해당 책의 원본 출판 연도를 계산해보면 일본에서는 90년대에 이미 이런 개념이 존재했다는 소리.] 그뿐이 아니라 1980년대 중국에서 발간된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 국내에는 1990년 처음 정발되었다.]이 이미 제갈량의 인생 여정을 서주 대학살에서부터 시작하며, 1996년에 발매된 《[[삼국지 공명전]]》에서도 제갈량의 어린 시절 회상으로 서주 대학살을 보여주고 있다. ~~공명전이 흥했으면 서주 대학살이 20년은 일찍 유명해졌을 텐데~~ 오히려 그 문제 많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대세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국내 삼국지 팬덤이 2000년대까지 《[[정사 삼국지]]》는 접근할 생각도 못하고 '대체 제갈량이 뭐 때문에 조조 제끼고 유비한테 간 거지?'라며 혼돈에 빠지느라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족히 20~30년 늦은 것이다.'''[* 이 때문에 "제갈량이 약소 세력인 유비 세력에서나 승상이 됐지 사실 조조 휘하에선 말단에나 오를 실력이라 유비에게 출사했다"는 식으로 제갈량 폄훼가 이뤄지기도 했는데, 정사의 기록만 봐도 제갈량은 훌륭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최소한 조조 진영으로 임관을 못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서주 대학살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제갈량이 모종의 이유로 조조 대신 유비 세력에 임관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말.] [* 중국과 일본이 《정사 삼국지》 혹은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실사 영상물, 게임, 만화 등 대중매체를 부단히 생산하면서 인물과 사건에 대해 정사까지 참고하는 해석과 재해석이 활발했던 반면, 한국의 《삼국지》 팬덤은 이런 매체 생산이 더뎠다. 물론 《[[고우영 삼국지]]》 같은 만화 작품들은 적잖이 나왔지만, 그 이전에 《삼국지연의》의 정역·완역 자체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모종강본 완역본》 나온 게 2000년대 후반의 일이니 말 다했다. 이문열은 제갈량이 조조에게 안 간 건 인재들이 넘쳐나니 자기가 가봤자 별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 뻔해서 그랬다는 주장을 정설처럼 내놓았으나, 배송지는 제갈량이 최주평에게 '님이 조조 쪽에 붙어봤자 조조는 수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눈에 띄지도 못할 거임'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제갈량 정도라면 아무리 조조 휘하에 선비가 많다 한들 출세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을 거'라 주석을 달아놨다. 배송지의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나 서진 시절부터 제갈량은 이미 높게 평가되어 왔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람들의 전반적인 평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도 제갈량 본인이 밝힌 것이 아니라 제3자의 평가이긴 하지만.] 제갈량의 남하시점에 대해서 조조의 서주 침공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한 제대로된 사서상의 언급이 없어 명확하지 않으나. [* 제갈현의 예주태수 관련 분쟁을 전후로 이전하였다면 조조의 침공과 비슷한 년도(193~195)에 남하했다.] 제갈량의 남하시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설령 제갈량이 남하 후 대학살이 진행되었더라도 '''자신의 고향을 파괴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제갈량의 친척들인 낭야군 양도현 '''제갈씨 다수가 위나라에 임관한 것''',[* 제갈량집에는 223년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인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언급되는데 화흠, 왕랑, 진군 같은 위나라의 명신들 가운데 알자복야 제갈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또한 조비의 1차 남정 때 조인 휘하 장군 중 제갈건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관구검의 난 즈음에 첫 등장하며 촉한멸망전에도 참여하는 제갈탄이 있다. 당시 제갈씨는 본적이 낭야군 양도현 하나 뿐이었다.] 왕랑, 진교, 진등 등 서주 출신 인물의 다수가 조조에게 협력한 점[* 진교, 진등의 고향은 조조군의 침공 지역이 아니긴 했으나 왕랑의 고향인 동해군 담현은 도겸이 끝까지 농성한 곳이다. 비록 담현이 함락되진 않았으나 그 일대는 초토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주 출신은 아니지만 조조가 공격한 지역인 화현[* 연주 태산군 소속이다.]이 고향인 장패 역시 조조에게 적극 협력했다는 점에서 제갈량의 고향이 조조에게 박살이 나서 제갈량이 조조에게 임관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상술했듯이 서주의 대학살이 당시부터 조조의 나쁜 이미지를 만들고 쌓아나가는 데 일조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인권 사상이 오늘날처럼 발달한 것이 아닌 고대에 역사가들에게는 민중에 대한 대량학살보다는 자기와 같은 신분의 귀족 유명인사를 한두 명 죽이는 것이 더 크게 악행의 이미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기록을 보면 서주에서의 대학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명사인 변양을 살해한 일이 크게 언급되어 있고,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인 사건에 대한 설명, [[진림]]의 격문 등에는 서주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진림의 격문에서는 백성을 탄압했다며 천명을 거스른다는 내용보다는 조조의 선대인 [[조등]]과 [[조숭]]을 두고 대대로 썩어빠진 가문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 더 많다. [[http://krighty21.blog.me/50046711091|#]] 다만 진림의 격문에 서주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중요하지 않았던 사건이라 말할 수는 없다. 위에 설명되어 있듯이 조조의 학살을 강조하면 도리어 군웅들이 조조에게 두려움을 품고 싸우려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데다가, 또한 원소는 서주 침공 당시 장수 [[주령]]을 보내 지원했으므로 이 문제에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을 피했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다만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은 원소가 '조조가 차마 저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모르고 지원한 것'이라고 말하면 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조조는 초기에 원소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며 협천자까지 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조조를 지원한 문제에 대해 원소는 상술한 논리, 즉 '조조가 그럴 줄은 몰랐지'로 대응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도 같은 논리로 '조조가 민간인 학살하라고 지원한 게 아니었는데 조조가 지 맘대로 학살했다'라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통해서 적어도 당대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서주에서의 학살이 명사 살해보다는 다소 중요도가 낮은 사건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당시에 중요도가 낮았던 사건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악행을 상당히 부각시킨 《[[삼국지연의]]》에서는 언급되지만 관련된 전설이나 [[경극]] 같은 것이 찾아보기 어렵다라는 걸 근거로 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어느 학살 사건도 전설이나 경극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서주대학살이 당시의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엄연한 비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극이나 소설 등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이런 작품들에서 백성만 대거 죽어난 사건이었을 뿐 전세에 영향을 미친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서주 대학살을 다룰 이유가 없다. 이것이 다루어진다면 재미와 대중성 둘 다 해치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를 비롯해서 대다수 경극에서 서주 전투 자체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정리하면 서주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대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행동은 맞으나, 명사들 몇 명 살해한 사건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판단 기준이 달라진 지식인들은 명사들의 살해보다 이 사건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한편 서주 대학살이 상대의 전투 능력을 말살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이라는 식의 의견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있다. [[https://youtu.be/JiQTSjbW2w4|링크]]. 중세 [[몽골]]의 학살이나 조선시대 여진 촌락에 대한 예방전쟁 같은 것과 비슷하게 보는 듯 하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사한 것은 전략적 목적에 의한 학살이었으나 그것이 상대의 결집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패전, 무시할 수 없는 적성세력 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고려의 여진 정벌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학살인가, 아버지를 잃고 눈에 뒤집혀서 벌인 만행인가, 둘 다인가는 알 수 없으나 [[임용한]]은 첫째가 주된 이유라고 보는 듯. 여기서 이전 시대의 전쟁에서 이런 일(집단살해)은 자주 있었다는 것이며, 임용한도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으나 당시 전쟁은 그랬다라고 넘어가는 듯하다. 물론 만약 조조가 전술적인 판단하에 행했다면 [[커티스 르메이|르메이]]와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2차대전]] 때 [[일본]]의 민간인들도 생산 활동으로 전쟁을 간접적으로 돕는다며, 일본 주요 도시들에 있는 '''민가들'''을 폭격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다만 임용한은 학자라는 입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행동에 최대한 합리적인 동기를 부여해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그 원균에 대해서도 나름 억울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양반이다.[[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90806/96843619/1|#]]~~ 그러나 이런 '전략적 판단'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정작 본거지인 연주의 통제도 불가능할 정도로 서주에만, 그것도 학살에만 집중했던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1차 서주 출정 당시에는 본인도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승패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장막에게 가서 의탁하라고 했을 정도인데, 전략적으로 사고했다면 도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시점에서 학살로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빠르게 철수를 하고 본진을 지켜야 했을 일이다. 윗 항목 조숭 일가의 몰살 기록 부분에 나와있듯이 서주 대학살 당시 조조는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이 서주 지역에서 도겸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오늘날에도 가족을 그것도 부모를 살해한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효의 사상이 더 강했던,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후한말 시절에는 증오심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조조가 감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가친척의 죽음에도 냉철하게 전술적인 판단을 내려 초토화 전략을 시행했다기보다는 조조가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의 비참한 죽음에 눈이 뒤집혀져서 저지른 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현대에 조조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또 인권 사상의 대두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규정되면서, 기존에는 비중이 컸던 명사 살해에 대한 악행은 별거 아닌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에 비중이 덜했던 그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조의 학살에 대한 현대인의 시각을 전근대 중국인에게 동일하게 대입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역사를 해석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 당장 [[수호전]]에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육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오지만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조조에 대한 반감은 어디까지나 황실을 핍박한 권신이었던 것과 명사들을 살해한 것이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조조의 학살을 이유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 아닌 이상 조조에 대한 반감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학살을 꼽기는 어렵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